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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G.W.F Hegel, 1770-1831) |
독일의 철학자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이론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그 위상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양한 비속화와 왜곡을 통해 보급되어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헤겔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헤겔 연구자인 미타 세키스케(見田石介)는 “헤겔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변증법이다. 오직 변증법이 전부라고 해도 된다”고 말한 바 있지만,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해서 근대의 공사(公私)분리 경향에 대해서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번 글에선 ‘변증법’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거기에 더하여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헤겔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우도 가져와서 함께 논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기전에 독일 관념론과 칸트적 맥락에 대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독일 관념론의 근본 문제 : 자유의 실현에 대한 간략한 글)
헤겔의 칸트 비판
헤겔은 칸트가 행했듯 물자체와 현상의 영역을 나눠두고, 경험•인식 불가능한 영역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불만스러웠다. 우리가 물자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방증이었다. 예컨대 망망대해에서 그물로 낚시를 해본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가진 그물은 10cm 이상의 물고기만 낚을 수 있는 그물이다. 우리는 그물에 걸리는 10cm 이상의 물고기만 보고 이 바다엔 10cm 이상의 물고기만 존재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10cm 이상의 물고기를 ‘규정’했다는 것은 10cm 미만의 물고기를 ‘부정’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는 부정적 규정―헤겔은 스피노자의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규정은 부정이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이다.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 10cm 미만의 물고기를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헤겔이 보기에 물자체라는 영역은 우리가 개념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고, 그것을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두는 것은 비합리적인 전제였다. “소위 물자체(Ding an sich)란 단지 공허한 추상의 사상물에 불과하다.”(V. I. 레닌 지음·홍영두 옮김, 『철학노트』, 논장, P.36. 헤겔 『대논리학』 제1권의 제2판 서문 부분 인용을 재인용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칸트는 물자체란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끝없는 점근운동만을 반복할 뿐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어떠한 개념이 학(學, Wissenschaft)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한 존재가 구체성까지 이르지 못하고 그저 추상성에 머물며 학이 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칸트나 피히테처럼 피안의 물자체를 상정하여 그 구체성으로 향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셸링처럼 구체성으로 이행하지 못했음에도 그 추상성을 ‘알 수 있다’고 공언하는 행위는 헤겔 입장에선 학문으로써 우리에게 드러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학문은 만인에게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존재는 추상적 존재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개념이 되어야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었다. 그 방법으로서 변증법을 제시한 것은 헤겔에게 있어 학(學)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변증법의 형식
그렇다면 변증법이란 대체 어떠한 형식을 갖고 있는가? 독자 여러분들이 당장 변증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변증법을 검색해본다면 알 수 있듯이,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이론적 오해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정보가 부족했을 때부터도 이러한 오해는 만연하였지만, 정보에 대해 접근하기 쉬워진 오늘날에도 그러한 문제는 여전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변증법에 대한 ‘오해’는 무엇일까? 그것은 변증법을 정반합(正反合)의 법칙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로 변증법을 바라보는 오해의 흐름을 따라가보면, 철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학설이 나타나면 자연스레 그에 반대되는 학설이 나타나고 그러다 한층 더 높은 학설이 나타나서 이를 종합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세 번째의 종합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정’이 된다는 것이—미타 세키스케의 표현에 따르면—“거리의 철학자들이 무책임하게 유포한 변증법”의 뜻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단지 철학사 혹은 이데올로기의 역사, 정치사 영역에만 해당하는 법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변증법이란, 범주(Kategorie)를 불문하고 모든 영역에 통하는 일반적 법칙이다.
이런 오류에서 비롯되는 가장 안 좋은 오해는 정반합이란 이해가 갖는 외면성과 ‘합’에서 나타나는 느슨한 절충주의와 무비판적인 실증주의이다. 정반합은 언뜻 보기에 변증법과 닮아있으나, 이 밑단 풀린 ‘변증법’에는 세 번째에서 첫 번째 것으로의 귀환(자기 내 복귀•귀환)도 없으며, 변증법이 갖는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정신은 빼놓은 채 ‘합’을 ‘정’과 ‘반’의 단순한 합산이나 무난한 중간물로 이해할 뿐이다. ‘합’에 무게를 둔 이 유사 변증법 사상은 현실을 무차별적으로 합리화할 뿐이다. 이런 낮은 수준의 이야기를 헤겔이 말했다면, 그가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느슨한 이해로부터 비롯된 해로운 오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변증법을 신비주의적 ‘비법’으로 여기게 만든다. 마치 앉아서 구만리를 내다보는 예언의 방법론처럼 말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저 생각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변증법이란 대체 어떤 형식을 갖는단 말인가? 바로 즉자-대자-즉자대자의 순서로 전개되는 형식을 갖는다. 즉자(卽自, an sich, in itself)란 말 그대로 주어진 것,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이해가 다소 어려울 수 있으니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가방을 생각하자면 ‘가방’이란 개념은 구체적인가, 추상적인가? 구체적일 수도 있고 추상적일 수도 있다. 적어도 가방 일반만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는 추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가방’ 안에는 수많은 가방들이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 주어진 많은 실재들을 분석하여 그것을 추상화시킨다. 그로부터 도출된 추상적 층위의 개념이 바로 ‘즉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자(對自, für sich, for-itself)란 무엇인가? 일종의 규정, 부정으로 도출된, 자기를 대상화(對象化)하는 상태로 볼 수 있다. 대자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자존재를 전제한다. 앞서의 가방으로 예를 들어보자. 세상에 한 가지 형태의 가방만 존재한다면, 굳이 대자적으로 그것을 따져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옆으로 매는 가방이라던지, 백팩이라던지 수많은 형태의 가방이 세상엔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백팩이라는 규정을 다른 형태의 가방과는 부정된 형태로, 동시에 규정된 형태로 우리는 따져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자기를 대상화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즉자대자(卽自對自, an und für sich, in-and-for-itself)는 앞서의 ‘즉자’와 ‘대자’가 다시금 ‘즉자’의 상태로 복귀한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자’에서의 규정•부정은 이 단계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변증법은 A=~A에 기초한 인식론이다. 형이상학, 형식 논리학처럼 동일률(A=A)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순을 배제하며 전개되지 않는다.) 다시금 가방으로 예를 들어보자. ‘즉자’적으로 가방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백팩으로써의 가방만을 우리가 안다고 가정해보자. 그랬을 때 새로운 형태의 가방, 즉 크로스백과 같은 가방이 등장했다. 처음에 우리는 이것이 가방인지 알 수가 없다. ‘가방’과 ‘크로스백’은 대자적으로 대립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다 가방의 기능, 형태 등에 크로스백이 부합하여 ‘크로스백’ 역시 ‘가방’의 일종임을 우리가 알게되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은 다시금 처음의 ‘가방’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즉자’의 가방과 ‘즉자대자’의 가방은 다른 것이다. 보다 구체화된 개념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왔지만 처음과 다른 무엇이 되는 것. A=~A가 되는 원환(圓環)을 그리는 과정,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말이 어렵지만, 이러한 사고과정은 사실 우리들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것들이다. 특히나 ‘과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방법론은 통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현상을 분석해서 원리를 도출해내고, 현상들을 이 원리를 토대로 분석한다. 또 현상들에 의해 원리는 부정되고 변화하고 더 구체화될 수 있다. 칼 포퍼가 이야기했듯,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갖는 학문이다. 경험적으로 이전의 원리는 부정되고 수정될 수 있는 것이다. 본질과 현상이 분석과 서술의 과정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이 모습이야말로 변증법의 참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 논리학과 변증 논리학
우리가 앞서 확립한 변증법의 형식은 곧 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학은 곧 형이상학, 그중에서도 존재론에서 발전한 학문의 영역이기에 세상 만물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듯, 우리가 무언가를 존재론적으로 파악할 때 인식과 더불어 논리적인 사고를 동반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왜 변증 논리학인가? 헤겔이 저서 『대논리학』을 저술하며 의식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까지 이어지는 형식논리학이다. 형식논리학은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라는 사고 법칙의 원리가 있는데, 이것들을 근본으로 하여 개념이나 판단, 추론 등의 여러 형식을 밝히는 방식이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논리학에서 사용하는 여러 범주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서로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를 형식논리학은 조금도 밝히고 있지 않은 채 각각의 카테고리를 그저 고정된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그 한계이다. 특히나 형식논리학에서는 연역논리학, 즉 동일률에 기초한 논리학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본래 형이상학은 칸트가 물자체를 나누듯, 세계를 구성하는 신적인 원리를 피안의 영역으로 놔두고 그것이 무엇일까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래서 그 도구로써 등장한 연역논리학의 방법은 신적인 A를 상정해두고 A=A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순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논리학은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만물은 유전하고 변화무쌍하다. 모순은 만물을 운동하게 하는 동력이다. 따라서 모순을 Aufheben(독일어로 지양•보존을 뜻한다.)하여 A=~A에 기초한 전개를 한다. 이는 형식논리학과 달리 어떠한 개념에 등장하는 범주 전부에 대해서 그 의미와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형식 논리학과 변증 논리학이라고 하면, 전혀 성격이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 근본을 더듬어보면 형식논리학의 사고 법칙도 세계 법칙이며, 그것의 사고에의 반영이다. 헤겔은 이 원점으로 돌아가 논리학을,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의 과학으로 파악한 것이다. 형식논리학의 세 가지 사고법칙도 그 나름대로 객관적 세계를 반영한 것이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물의 상대적 고정성, 동등성과 차이, 동일성과 구별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사물의 운동, 즉 보다 근본적인 객관적 세계의 존재방식을 파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이리하여 세계의 구조나 운동법칙을 보다 깊이 파악하는 논리학, 곧 변증논리학이 요구되게 되는데, 헤겔 논리학은 바로 이 요청에 답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이 헤겔을 이해하고 변증법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로 치면 『대논리학』이라는 저서에 이러한 변증 논리학이 집대성되어 있는데, 극도의 추상성 위에서 그 논의가 펼쳐지다보니 이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음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이 논리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헤겔의 나머지 저서들이 모두 이 논리학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법철학』도 『정신현상학』도 심지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이 변증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비로소 온전한 이해에 닿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재차 강조하듯 『대논리학』과 그에 부대하는 변증 논리학의 설명은 양적인 방대함과 더불어 텍스트의 난해함 때문에 쉽게 이해되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가 그의 저서인 『자연의 변증법』에서 정식화한 양질전화와 그 역의 법칙, 대립물 투쟁과 통일의 법칙, 부정의 부정 법칙이라는 입론을 통해 그것을 알아볼 것이다. 세 법칙은 각각 헤겔 『대논리학』의 존재론(이행), 본질론(반영), 개념론(발전)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 세 법칙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엥겔스의 세 명제
엥겔스가 정식화한 세 명제는 각각 a) 양질전화와 그 역(逆)의 법칙, b) 대립물 상호침투의 법칙, c) 부정의 부정의 법칙으로 규정된다. 앞서 말했듯 이는 『대논리학』 1, 2, 3부의 내용을 극도로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따라서 『대논리학』 서문에서 논리의 진행과정에 대해 언급한 “근거로의 복귀”, “자기 내 복귀”라고 하는 말을 이해해야 위의 세 명제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예시를 들어 설명하겠다. 우선 어떠한 A가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1) A 그 자체, 2) A의 질적 규정, 3) A의 양적 규정 이렇게 세 가지를 논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존재 A를 인지한다고 했을 때, 이것을 규정하는 것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가령 책상을 예로 들어볼까? 형태, 재질, 색상 등등... 이런 수많은 규정들이 더해졌을 때에야 책상이 바로 우리 눈 앞의 그 책상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책상은 1) 책상 그 자체, 아주 추상적인 형태의 책상일 것이다. 그러면 책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 책상 그 자체에서 2) 책상을 구성하는 여러 질적 규정에 대한 이해로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 둘은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책상을 구성하는 질적 규정들이 책상과 같은 것이라는 동일성이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일성이 곧바로 파악될 수 있을까? 가령 갈색인 책상이란 규정을 파악했다고 해보자. 이 세상에 갈색인 책상은 정말 무한하게 많다. 어떠한 질적인 규정을 파악한다고 해서 곧바로 1)에서 2)로의 이행에 대한 근거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반면 3) 책상을 구성하는 여러 양적 본질들의 입장에서 보면 3)이 ‘얼마나’ 결정되어 있는가에 따라 1) 책상 그 자체로 이행하는 계기가 생겨난다. 이 관점에서 앞서 다루었던 1)에서 2)로의 이행은 기껏해야 무엇이 우리의 표면에 드러나 있는가, 무엇이 현상으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가 하는 차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시말해 3)에서 1)로의 이행의 입장에서 보자면 1)에서 2)를 매개하는,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근거는 3)에서 1)로의 이행 과정에 대한 이해로 해명이 된다. 1)에서 2)로 이행했다가, 다시 3)에서 1)로 복귀하는 형태, 다시 말해 “근거로의 복귀”, “자기 내 복귀”가 변증법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이 과정을 줄여서 말한 것이 a) 양질전화와 그 역의 법칙이다. 1)에서 2)로 이행할 때 책상이라는 추상적 규정이 전혀 다른 여러 질적 규정들로 이행하고, 3)에서 1)로 이행할 때 그 질적 규정들이 양적 규정들로 전화되면서 이 전체 운동의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와 3)의 관계, 다시 말해 양과 질 간의 관계이다. 헤겔의 『대논리학』 구성으로 말하자면 존재론적 차원과 개념론적 차원의 문제인데 이는 ‘본질론’으로 설명된다. 그것이 b)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이다. 본질론이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앞서 1)에서 2)로 이행하는 것이나, 3)에서 1)로 이행하는 것이나 사실은 1)의 내부에 2), 3) 등의 ‘타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즉 A라는 규정 속에는 ~A라는 규정이 이미 들어가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무엇인가를 A라 규정할 때에는 ~A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규정엔 부정이, A 속에 이미 ~A라는 타자가 포함되어 있다. 대립물에 있어 타자가 이미 각자에게 침투되어 있다는 b)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이 여기서 2)와 3)을 매개하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타자가 이미 내 안에 침투해 있다는 것, 내 자신이 타자의 반영일 뿐이라는 것, 다시 말해 서로 침투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논리학』 2부 ‘본질론’은 ‘반영’에 대해 다루고, 그것을 엥겔스가 상호침투라고 정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운동 속에서 A와 ~A의 관계처럼 처음엔 대립물이었던 것이 즉자대자에 이르러서는 통일적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책상 안에 있던 A와 ~A라는 규정은 각각 양질전화와 상호침투 법칙에 따라 ~A와 A로 변하게 되는데 A에서 ~A로, ~A에서 A로 라고 하는 이중의 부정 속에서, A와 ~A는 대립물의 상황을 부정(제1의 부정)하여 모순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다시 이 상황을 부정하여(제2의 부정=부정의 부정) A와 ~A가 통일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에서 c)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관철된다. 이는 앞서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3)에서 1)로 이행하는 과정에 각각 대응하는 것이다. 1)에서 다시 1)로 돌아오는 과정에 제1의 부정, 제2의 부정이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이는 부정의 부정 법칙이다. 이 c) 부정의 부정 법칙을 통해 운동은 자기 자신의 근거를 산출하며 복귀한다.
이상이 변증법의 기본적인 운동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 과정 속에서 자신의 근거를 산출하는 것, 그 자신으로 복귀하며 재생산을 이뤄내는 것, 동일성 속의 차이를 드러내어 모순을 배태시키는 것, 처음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며 원환(圓環)을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변증법이 목적 지향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마르크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마르크스가 무슨 사회주의 낙원, 유토피아를 상정했다느니... 등의 잘못된 이해를 퍼뜨리곤 하는데, 위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변증법적 운동에는 어떠한 목적을 상정하는 바는 찾아볼 수 없다. 변증법은 철저하게 ‘자기반성’적 운동이다.
이러한 오해는 변증법을 예언의 방법 정도로 신비화시키곤 한다. 변증법을 열심히 적용해서 역사의 목적지를 알아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변증법이 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그냥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 거다. 마치 앉아서 구만리를 내다볼 수 있게 해주는 비법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앞서 말했듯이 경험 속에서 개념이 자신의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재생산하는 운동에 불과하다. 변증법적 의미에서의 발전이란 앞서 말했듯 ‘반성’ 속에서만 나타난다. 우리가 어떠한 개념의 역사적 의미를 읽어내는 건 지금 이 시점에서, 지금 이 순간의 실천 속에서만 반성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계속된 반성으로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이야기했듯,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물녘에야 그 날개를 펼친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죽을 때까지도 공산주의 사회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세력의 무한한 실천 속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독일이 부활하는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커다란 울음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라고 헤겔에 응수해서 이야기한 바는 갈리아의 수탉은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아오른 다음에 울기 시작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변증법은 곧 실천이다. 실천이 없이, 운동이 없이는 무엇이 맞는지 틀린지, 그게 무엇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대신에 그냥 실천을 하는 것이 아닌 논리적 필연성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연적 실천들이 중첩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변증법에 ‘목적’이란 없다. 변증법적 ‘발전’이란 실천 속에 무한한 반성적 운동을 통해 그 의미를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
변증법적 방법의 적용
앞서 우리는 변증법의 형식을 확립하고 그 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증법을 실제 적용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아니 그전에 변증법의 방법론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답을 먼저 말하자면 1) 구체로부터 추상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2) 변증법적 상승의 과정 속에서 모순을 잡아내고, 3) 그 전체를 확립하고 4) 변증법적으로 제계기들을 종합하는 방법을 배우는 의미가 있다. 헤겔이 늘 변증법을 강조하며 추상으로부터 구체로의 상승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추상”은 우리에게 어느 순간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추상을 얻어내기 위해선 구체로부터 추상으로 하향(下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하향의 과정에서부터 얻어진 추상과 카테고리들을 유기적으로 서술해나가는 상향(上向)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다루며 변증법을 보다 심층적으로 알아볼 예정이다. 내가 이 부분을 서술하기 위해 참고한 책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미타 세키스케의 『마르크스의 방법론 연구』이다.
변증법적 방법의 기초로서의 분석과 종합
먼저 변증법적 방법의 기초로서의 분석이다. 마르크스는 저서인 『자본론』을 쓰며 어떠한 방법론을 토대로 ‘변증법적’인 서술을 행했는가? 이에 대한 힌트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의 인용을 보라
“예를 들면, 17세기의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살아 있는 전체, 즉 인구, 국민, 국가, 다수의 국가등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분석에 의해 몇 가지의 규정적인 추상적·일반적 관계, 예를 들면 분업, 화폐, 가치등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들 개개의 계기가 많건 적건 고정화되고 추상화되기 때문에 노동, 분업, 욕망, 교환가치와 같은 단순한 것으로부터 국가, 제국민간의 교환, 세계시장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경제학의 제체계가 시작된다. 후자의 방법은 분명히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과학적인(학문적인) 방법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다. 이를 변증법적 분석과 서술로 후술할 예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을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것의 표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제요소들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컨대 인용한 부분에서 경제를 분석할 때의 인구, 국민, 국가, 계급 등의 요소가 그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난 표상으로부터 추상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이루는 카테고리들을 추출하며 하향(下向)하는 방법을 쓴다. 이를 하향법(下向法)이라 한다.
그러나 각각의 카테고리, 즉 제요소들이 이루고 있는 순서와 논리를 따져보지 않는다면 이는 학문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 구체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제규정의 총괄이며 다양한 것들이 통일적 관계를 이루고 있어야 비로소 구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변증법적 관계에서는 구체가 현실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분석은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어떠한 사변적인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변증법에서 이야기하는 카테고리들에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창조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만 늘어놓는다고 그것이 학문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오성(Verstand)이 작동하게 되어 사실의 ‘분석’이 시작된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적 전제로부터, 따라서 예를 들면 경제학에서는 모든 사회적 생산행위의 기초이고 주체인 인구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올바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파고 들어가 고찰해보면 오류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구는 만약 그것이 구성되어있는 다양한 계급을 제외한다면 하나의 추상이다. 또한 계급도 임노동과 자본 등 그 기초를 이루는 제요소를 알지 못한다면 역시 하나의 공허한 말이다.
임노동과 자본등은 교환·분업·가격등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면 자본은 임노동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가치·화폐·가격등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인구로부터 시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전체의 혼돈된 표상일 뿐이며, 한층 상세한 규정을 줌으로써 나는 분석적으로 차례로 보다 단순한 제개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사실의 지식도 그것만으로는 과학적으로 ‘추상’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의 분석일 것과 사실로부터 거기에 현상하고 있는 본질적인 것을 분석할 것, 이 두 가지가 분석의 요건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것을 추출하는 작용을 ‘추상’한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연과학자의 ‘현미경과 시약’으로 비유하며 사실을 가능한 한 단순화 시킨 다음에 본래의 분석으로 들어가는 예비 작업으로 보았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가치분석의 경우에 추상을 행했던 부분을 살펴보자. 자본주의사회의 상품은 거의 모두 자본의 소산으로서의 상품이며 상품가치는 그 내부에 잉여가치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상품이 자본의 소산이라는 것, 그 상품가치가 잉여가치를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분석에 있어서 혼란을 줄 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본의 소산으로서의 상품을 단순한 상품으로서 ‘추상’하여 취급한다. 이와 같은 단순한 상품도 또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결합체이며 자연형태와 가치형태라는 두 형태를 갖는 이중물이다. 그러나 상품가치가 문제인 당면의 경우에는 사용가치의 측면은 조금도 관계가 없는 것이고, 이중물로서 복잡한 형태로 상품을 취급하면 문제 해결이 곤란해진다. 그렇기에 사용가치의 측면을 사상하여 일면적으로 (교환)가치의 측면으로부터만 취급한다. 이와 같이 사태를 단순화시킴으로써 가치의 본성을 이해하고 비로소 상품의 이중성과 모순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변인 통제와 비슷하다)
오늘날 사회에서 상품의 가치는 모두 가격으로 표시되고 가치형태는 가격형태 또는 화폐형태로 대표되고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치형태의 최고 완성 형태인 화폐형태는 가치의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로 존재할지는 몰라도 가치가 가치이기 때문에 갖는 불가결한 조건은 아니다. 화폐에 의해 가치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의해 화폐가 이해된다. 그리하여 화폐형태도 사상되고 가장 단순한 가치가 가치이기 때문에 절대적 요건으로 되고 있는 형태,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한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된다고 하는 개별적인 가치형태, 이것이 추출되고 분석된다.
이 가치표현의 양식은, 한 쪽은 그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이고 다른 쪽은 거기에 다른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 즉 한 편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존재하고 다른 편은 등가형태로 존재하는 상품으로서 서로 대립적이다. 그러나 가치의 본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립적 형태규정과 상호관계는 필요 없다. 그러므로 두 상품의 이러한 형태적 구별도 사상되고 그것은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모양으로 『자본론』에 서술된 바처럼 “교환가치는 무엇보다도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될 때의 양적 관계, 즉 비율―때와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는―관계로서 현상하는” 것으로서, 단지 두 사용가치의 등치관계로서 취급된다.
이것이 ‘추상’이다. 우리가 분석을 통해 얻어내는 각 제요소들은 불가분의 일체성을 갖고 있으나, 이것들을 포착해서 설명하려면 우리의 오성적 작용을 통해 분리하고 순수한 자태로서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매한 자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현자는 쉬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다.
추상은 비본질적인 것의 사상이지만 그것은 단지 우연적인 것의 사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적인 것의 사상도 분석에 있어 필요한 전제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분석하려는 사태(事態) 그 자체의 보다 구체적인 제형태를 사상해서 사태를 단순화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사상된 것들은 당면한 분석에서는 비본질적이다. 그러나 한층 전개된 분석의 단계에서는 사상된 것들 모두가 본질적인 것이다. 또 분석의 층위에 따라 추상으로서 나타나는 것도 다른 단계에서는 분석이며, 분석인 것도 다른 단계에서는 추상이 된다. 즉 분석과 추상이란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며 상대적으로 구별될 뿐이다.
동시에 사실에 분석에 의해 획득된 카테고리는 여러번의 추상에 의해 얻어진 사실로부터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이미 카테고리는 순차적으로 구체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에 있어서만 구체적 사실을 획득할 수 있는 일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석은 추상적인 것을 분리하는 일인데, 그렇다면 이 추상적인 것의 기체(基體)란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가치의 분석을 예로 들자면 교환가치는 “한 종류의 사용가치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가 적당한 비율로 등치된다는 형태”로 우리에게 드러나는데, 두 개가 등치된다는 것은 이 둘이 ‘한 쪽도 다른 쪽도 아닌’ ‘제삼의 것’으로 환원되는 한, 다시 말해 이 둘에서 제삼의 것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두 상품의 사용가치란 아주 성격이 다른 무언가일텐데, 어디서 공통의 제삼자를 발견하면 좋은 것일까?
마르크스는 이들 서로 다른 두 사용가치 속에 존재하는 공통의 제삼자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모든 구체적 노동의 일면을 이루는 동질·동등한 추상적 노동 즉 인간적 노동력이 지출되고 이것이 양자에 대상화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선 증명한다. 그 다음 노동이 일반적으로 한 측면으로서 갖고 있는 생리학적 사실인 추상적·인간적 노동은 동시에 한 사회가 각 산업부문에 분배하는 사회적 총노동력의 일분자라는 의미를 갖고 따라서 개개인의 노동이 갖는 사회성을 나타낸다.
가치란 이러한 일분자의 자연물도 포함하지 않는 사회적 실체의 대상화이며, 그것은 물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관계이며 물적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어떠한 사회에서도 언제나 사회적 노동이다. 그러나 상품생산사회 이외의 사회에서는 노동의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이 그 사회성을 이루었고, 상품생산사회에서는 추상적 노동이 개개인의 노동의 사회성을 이루게 된다. 추상적 노동이 개개인의 노동의 사회성을 이루게 된 것은 단지 개개인의 노동이 직접적으로는 사적 노동으로 되는 상품생산사회에 있어서만 그러하며 따라서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은 사회적 노동이지만 역사적으로 특이한 사회적 노동의 형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가치가 이와 같이 물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인 이상, 상품은 그 가치를 자신의 신체에 의해 표현할 수 없고, 자신의 사용가치로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를 등치시킴으로써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한 상품과 다른 상품과의 관계라는 기묘한 형태를 취하는 교환가치는 가치의 필연적 현상형태임을 증명하고 있다.
나아가 상품이 노동생산물과 사용가치로서 단지 물적·감성적 성질을 가질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초감성적 성질을 갖고 동시에 물적 성질을 갖는다는 것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사회적 노동 또는 노동의 사회성이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으로 밝혀지고, 사회관계가 이와 같이 물화하며 물질이 이처럼 사회적 성질을 갖는 까닭은 상품생산사회에서의 노동이 언제나 사회적으로 할당되지 못한 각자의 사적 노동이기 때문이고 이러한 사회성은 단지 상품 교환에 성공하는 것에 의해서만 증명되며, 상품교환에 있어서만 그 사회관계가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회관계가 물질 그 자체의 속성, 가치로서 현상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마르크스의 가치분석을 다소 길게 설명하였지만 이러한 바들을 탐구함으로써 변증법에서 이야기하는 분석이란 무엇보다도 우리의 표상에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합리적 추리에 의해 표상으로 현상하는 본질적인 것을 분리해내는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분석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의 추출이다. 그러나 같은 표상의 평면 상에 있어서 구체적인 제현상의 특수성을 사상하여 그 공통성으로서의 보편을 추상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사실의 배후에 있고 거기에 현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본질로서의 보편과, 그 발견에 의해 대상의 단순한 표상이 개념으로 변화하고 인식 내에서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이성적 인식으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보편이 분석이 분리하는 보편이다.
주의해야할 것은 마르크스가 분석하는 보편이 언제나 특수적·구체적인 것을 함축하고 필연적 연관을 내포하고 있는 보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추상적 노동과 사회적 노동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까지 상승할 필연성은 전혀 없다. 그것은 노동의 대상화라는 추상적인 제요소를 종합하는 과정에서, 즉 상향(上向)으로부터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카테고리로 도달하는 것이다. 분석이 분리하는 보편은 그 발견에 의해 대상의 단순한 표상이 개념으로 변화되는 대상의 보편적 요소이지 그 이상 그것이 해당의 구체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분석에 의해 카테고리가 획득되면 이번엔 상향(上向)의 과정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처음부터 전체의 구체적 표상을 생각하고 그것을 분석하며 상승하는 과정이다. 변증법적 방법은 일반적으로 제현상의 필연성을 분명히 하는 방법이며 사물의 유기적 통일과 발전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주어진 사실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종합적 방법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단순한 종합의 방법이 무시되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변증법적인 분석과 서술의 과정속에선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상 분석과 종합은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개념으로부터 그 전개를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가당착적인 일이다. 어떠한 개념은 그 표상의 분석에 의해 획득된 제요소로부터 재구성의 과정(상승과정)을 통해 그 성과로서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러한 개념이란 결국 표상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론』 역시도 우리 표상에 주어진 상품을 전제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것부터 그 논의를 시작한다. 이 분석의 성과로서 사용가치 또는 가치의 개념이 획득된다. 이 과정은 그저 분석을 한 것 같지만 분석을 통해 가치의 개념으로부터 상품의 개념으로 상승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마치 기하학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삼각형 일반과 기타 보다 추상적인 정리와 공리로 귀착시키는 분석과정이 다름아닌 추상적인 제정리로부터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상승하는 과정을 이루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종합은 왜 분석을 포함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추상적 카테고리로부터 구체적 카테고리로 선험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소극적 이유 때문이다. 전자로부터 후자가 자명한 것으로 선험적으로 연역된다면 둘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고 카테고리의 이행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구체적인 것을 표상에 떠올리며 그것을 순차적으로 분석하고 개념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추상적 카테고리로부터 선험적으로 구체적 카테고리를 연역할 수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추상적 카테고리로부터 구체적 카테고리로의 상승이라는 방법이 갖는 본래의 의의와 목적이 우리가 주어진 제사실을 방법적·계통적으로 이해하고 증명하며 설명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대상인 세계 그 자체가 우리에게 나타내는 자태, 즉 구체적 사실이 주(主)이고 그 이해가 목적이다. 그렇기에 구체적 사실·현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분석하여 이미 알고 있는 제요소에 귀착시켜 이해하는 것이 방법의 실질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추상적 카테고리로부터 구체적 카테고리로 상승하는 것에는 또 하나 역으로 선행하는 추상적 개념이 후속하는 구체적 사실에 의해 설명되고 검증되어 가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절대적인 전제로부터 전제된 것으로 진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제 그 자체가 전제된 것에 의해 기초 지워져 진전하는 과정이다. 이는 단지 추상적이고 기초적인 개념에 의해 구체적 제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추상적 개념 그 자체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그 내용을 충실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구체적인 것을 표상에 떠올리면서 분석하고 이미 알고 있는 카테고리로 귀착시켜 그것에 의해 설명해 나가는 것과 같은 종합과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카테고리는 그것으로부터 구체적인 제사실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추상적이고 생명이 없는 개념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개념과 자본개념이 사실로서의 구체적 제현상에 의해 진리성이 검증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구체적 제형태와 제현상은 단지 별도의 다른 사실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많건 적건 둘은 모순되고, 일반적인 이론의 진리성을 의심하는 듯한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상적 개념만이 독자적으로 이야기된다면, 모순된 사실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의문과 반박을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추상적 개념 자체는 이 문제를 조금도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방법에서는 가치개념과 자본개념의 증명은 최초의 확정시기에 완료되는 것은 아니다. 그 증명은 구체적인 제형태의 전개가 끝날 때까지 여러번 반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또한 가치개념과 자본개념은 그 최초의 형태에 있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제형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발전한다. 『자본론』의 전개는 가치개념과 자본개념을 설명하고 증명하는 과정이며 그 개념의 발전과정이라는 것이 변증법적 방법의 특성이다.
분석과 모순에 대하여
그렇다면 이러한 변증법적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 때 몇 가지 의문이 따라올 수 있다. 1) 분석은 어디까지 행해져야 하는가, 2) 상승의 동력인 모순은 어떻게 도출될 수 있는가, 그리고 3) 전체를 어떻게 확립하는가가 그것이다. 우선 1)부터 해명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석은 가장 근원적이고 초역사적인 개념까지 행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자기지시적 개념, 즉 부동의 원동자와 같은 개념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추상 노동’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적 카테고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추상적 카테고리는 전역사적으로도 구체적 카테고리에 선행하여 자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검토한다. 가장 단순한, 가장 추상적인 따라서 모든 사회 형태에 타당한 카테고리인 노동이 전체 역사적으로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를 문제로 하는 것이다.
“노동의 이러한 예가 가리키는 사실은 가장 추상적인 범주로서도―틀림없이 그 추상 때문에―모든 시대에 대하여 타당하지만, 더욱이 이 추상이라는 규정성에서는, 역시 역사적 제관계의 산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 완전한 타당성은 다만 제관계에 대해서만, 또 이러한 제관계의 내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노동이 가장 추상적인 카테고리이며, 그것이 모든 시대에 타당하다는 사실은 전제되어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본주의 시대에 비로소 추출되어 고정화할 수 있는 카테고리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이 먼저이고 노동이 나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추상적인 것·요소적인 것이 마지막으로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이 논리적으로도 나중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탐구의 역사적 순서는 오히려 서술의 순서, 논리적인 순서와는 반대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요소적인 것은 마지막으로 발견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일반이 부르주아사회에서 비로소 추출되어 고정되었다는 사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인간이―어떤 사회형태에서든―생산하는 주체로서 등장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오래된 관계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 발견되었다는 데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면으로는 옳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옳지 않다.”
그리고 이 발견은, 노동이 다종다양하게 발전하여, 어떤 종류의 노동도 이미 모든 것을 지배하는 노동일 수 없게 된 근대 사회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명백히 한다. 또한 노동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상태가 근대 사회엔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를 경험하고 표상할 수 있을 때 노동일반의 추상이 가능해진다.
다음으론 2)를 해명해보자. 내가 참고한 미타 세키스케의 저서에는 모순을 파악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지 않다. 미타는 마오의 『모순론』을 일부 인용하여 모순엔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이 있고 그것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서술로는 그 무엇도 설명할 수 없다. 모순은 서로를 배제하며 동시에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이며, 이는 상향(上向)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나타난다.
상품의 두 측면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모순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양극, 대립하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하는 예시를 들어보자면, 헤겔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대립적 요소를 ‘모순’이라 주장한다. 북극과 남극, 남성과 여성 등은 그 자체로 보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볼 대 이것은 ‘추상적인 대립’일 뿐 ‘현실적인 대립’은 아니다. 현실적인 대립이란 서로가 서로를 ‘매개’조차 할 수 없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범주를 전제로 그 유형적 분화에 지나지 않고, 마찬가지로 북극과 남극도 하나의 ‘극’이라는 범주에서 방향만 반대되는 유형적 차이로 파악된다. 진정한 의미의 대립, 모순이란 인간과 비(非)인간, 극과 비(非)극이라고 하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저 상품에 내재되어 있는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통일적 관계 그 자체이다. 오히려 모순이란 자본과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이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힘과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힘, 그 자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상품의 모순이 드러나는 과정도 이와 같은 ‘운동’ 속에서 나타난다. 사용가치와 가치가 대립하게 되는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운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상품이 지닌 ‘이중성’이 사용가치의 실현과정과 교환가치의 실현과정이라는 현실적 이중 운동으로 나타나고 그 연장에서 가치형태라고 하는 운동과정이 전개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모순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A=B라고 하는 등가형태 속에서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상품 A는 가치로서는 어떠한 상품과도 교환될 수 있는 동일성,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보편성을 지녔지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사용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상품을 통해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특수한” 상품구매자하고만 구매될 수 있다. 즉 하나의 상품은 그 자체로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수적인 것이고, 이 과정은 서로 자신이 지닌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로 만들고자 하는 교환과정 속에서 하나의 모순으로 전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내가 지닌 상품 A가 화폐와 같이 일반적 등가물이 되었으면 하는 욕망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또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공통의 척도에 따라 상품을 교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상품 A가 일반적 등가물이 되면 곧바로 그 나머지, ~A는 일반적 등가물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 대립이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곧 상품이지만, 동시에 상품도 곧 화폐이다. 화폐가 상품이라는 단순분석·단순종합의 인식을 넘어서, 상품이 곧 화폐라는 인식에 이르는 것, 그리하여 단순히 화폐가 상품이기 때문에 상품은 보다 일반적인 유(類)이고 화폐는 그 유의 한 종(種)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반대로 상품에 화폐로의 발전의 ‘맹아’가 내재해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까지 가는 것이 변증법적 방법의 특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모순이란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운동이란 “모순을 지양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순 자체를 배태하는 과정인 것을 알 수 있다.
단순분석-단순종합이 어떤 물건의 무게를 파악할 때 그저 일정한 질량을 지닌 물건이 중력의 작용에 의해 특정한 무게를 지니게 된다, 정도만을 이야기한다면 변증법적 방법은 그것이 왜 하필 ‘지구’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그 위치에 놓이며 그러한 무게를 갖게 되었는지와 같은 전체적인 분석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자본이 상품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다시 말해 자본의 전제가 상품이기 때문에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하면 서로 모순이 되어버린다. 자본의 전제는 상품인데, 상품 그 자체는 자본의 결과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상품의 전제가 자본이 되어버린다. 서로가 서로를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악순환’이 생겨버린다. 여기서부터 이미 모순이 나타난다. 결국 과학적 분석이란 분석을 통해서 그 자신의 전제에 대해 해명하는 방식으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의 원환(圓環)을 취할 수밖에 없다.
추가) 변증법에서 논리와 역사간의 관계
앞서의 논의에서 우리는 논리와 역사간의 관계에 대해 약간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학계의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논리와 역사가 즉자적으로 일치한다는 논리=역사설과 논리와 역사는 분리되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리≠역사설이 그것이다. 앞서 정통파로 대표되는 논리=역사설은 현실이 논리적 전개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부분을 설명할 수 없는 맹점이 있었고, 우노 학파로 대표되는 논리≠역사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단계론적인 이론들을 계속해서 도입하는 우를 범하기 마련이었다. 변증법적인 서술의 순서는 기본적으로 논리적 순서이다. 이는 역사와 즉자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자본론의 순서인 상품-화폐-자본을 보자면, 화폐가 가장 먼저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화폐의 기원은 생산에서 괴리되어 자급자족을 할 수 없던 군인들에게 그 급료로 대신 지급해주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의 완성된 형태, 즉 교환가치의 담지자로서의 그것은 자본이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상품의 경우에도 그렇다. 자본의 전제가 화폐와 상품이지만 상품과 화폐의 전제 역시 자본인 것이다. 그렇기에 논리와 역사의 관계는 처음엔 불일치하지만, 논리적 순서속의 전제들이 운동속에서 전제된 것들로 변화하게 된다면 그것은 종국적으로 논리=역사의 양상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3)이 해명된다. 전체의 확립이란 분석 과정 속에서 그 전체 구조의 재생산을 이끌어내는 카테고리들이 모두 확립되었을 때 비로소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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