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iedrich August von Hayek |
신자유주의란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정치적·경제적·사상적 조류로, 복지국가의 자본 통제에 반대해 고전적 자유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부활시켜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관철시키려는 기제를 지칭한다. 경제적 자유주의를 핵심으로 하며 국가의 사회 개입에 반대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에서 기원하였으며, 경제적 자유의 확대가 궁극적으로 정치적 자유의 증진으로 이어진다는 신념을 고수한다.
신자유주의를 주창한 학자로는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가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살펴보았을 때 기존의 고전적 자유주의적 관점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이에크는 개인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보는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부정한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인간의 본질은 “구조적으로 무지한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은 본래적으로 한계가 많다는 뜻이다.
개인은 매일매일 자신의 삶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에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고 새로 창출하기도 하지만, 그 정보들은 모두 부분적이고 오류가 많으며 불완전하다. 이러한 전제 자체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가 말하는 보수적 인간관을 수용한 것이라고 일본의 정치철학 연구자 우노 시게키(宇野 重昭, 1930~2017)는 지적한다. 하이에크는 보수주의적 인간관을 전제로 그로부터 자유주의적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인간들은 비록 무지하고, 언제나 불완전한 지식 체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을 행하는 존재이다. 지적으로 완전하기에 실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무지하게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 실천이 누적되고 반복됨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해도 되는지, 하면 안 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반복적 행위가 관습으로, 규칙으로, 더 나아가 “구조적 질서”로 발전해 나가는데 이를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고 부른다.
하이에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안 학파는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 질서를 형성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인간이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존재로서 홀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행동 규칙 및 질서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들은 매 순간 부족한 지식으로 고통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실천을 통해 지식을 검증하는데, 그 검증 기제가 바로 시장경제가 주는 가격 메커니즘이다.
시장경제를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불완전한 지식에 토대를 둔 계획의 성공과 실패를 알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지적으로 보다 성숙해지고 유능해지게 된다. 어떤 행동이 시장경제를 통해 환영받고 전파되는 건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다른 행위자들은 시장경제에서의 성공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며 보다 똑똑해지고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시장경제를 매개로 하여 개인은 ‘자생적 질서’ 속에서 보다 현명해지고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시장경제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고 보다 나은 상태로 이끄는 메커니즘을 제공해 준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국가’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제공해 줄 수 없는 기구였다.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의 형성을 가로막거나 왜곡할 수 있는 국가 → 사회로의 개입을 부정하였다. 기껏해야 야경국가와 같이 안보 및 질서 유지에만 힘쓰는 정도가 최선이다. 하이에크는 국가의 과제를 강제 기능과 서비스 기능으로 나누어 1) 계약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강제 기능, 2) 공공 재화의 산출 그리고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인 서비스 기능으로 나누어 통찰하고 이를 국가가 수행해야 할 ‘적극적 과제’로 이외의 것을 ‘소극적 과제’로 분류하는데, 자원을 배분하고 공적 복지 서비스에 그 자원을 투입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될 과제로 규정한다면 앞서의 2)의 기능은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국가의 역할은 사유재산을 지키는 질서 유지의 기능 정도를 수행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이에크식의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적 전통과 결합함으로써 ‘(경제적) 자유’를 최일선에 놓고 보수주의가 내세우는 인간 행위의 반복성, 지속성, 전통, 관습, 문화 등의 가치를 수용하여 기능했다. 하이에크의 이론은 어떠한 정치적 결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이 결단을 내리는 것은 오로지 사회주의로부터 자유시장경제를 보호할 때뿐이다.
이렇듯 하이에크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폐위시키고자 하는 ‘정치’는 경쟁적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대항하여 ‘평등과 사회정의’를 열망하는 ‘민주주의’를 뜻한다. 신자유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1938년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Colloque Walter Lippmann)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1920년대 사민주의 정당의 선거 승리에 힘입어 보통선거와 당파 민주주의가 자유 시장에 부과한 사회 규제 형식에 대한 대응”으로서 명백히 “민주주의가 자유 시장에 가하는 ‘경제의 정치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이론과 실천 및 전략·전술적 방안을 논의한다. 하지만 이를 ‘자유방임’의 주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1984)는 질서자유주의자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 1899~1966)가 신자유주의의 명칭으로 ‘적극적 자유주의’를 제안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개입하는 자유주의’를 뜻하며, “시장의 자유에는 능동적이고 극도로 용의주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명제로 설명된다.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18~19세기의 자유주의 전통과 단절하는 결정적 차이를 시장경제와 자유방임 원칙의 분리에서 찾는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를 “자연질서의 자연적 결과”가 아닌 “국가의 사법적 개입주의를 전제하는 법 질서의 결과”로 본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내면화시킨다. 경쟁은 본질적인 경제 논리로서 “세심하고 인공적으로 정비된 특정 조건 아래에서 나타나고 그 효과를 생산”하며, “규범적 이론, 즉 달성하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하나의 이상형”이 되고, 그 자체로 “통치술의 역사적 목적”이 된다. 이는 자유방임이 아닌 “용의주도, 능동성, 항구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정책은 단순히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아닌, 시장을 구성하는 조건에 개입함으로써 경제 질서를 경쟁의 원리에 맞게 다시 창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자유주의자에게 의료, 교육, 토지 사용권 등에 대한 보편 복지를 추구하는 사회 정책, 또는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사람들의 소득과 소비와 관련하여 “평등화”나 “균등한 조절”을 목표로 하는 사회 정책은 “반경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장에서의 경쟁과 그로 인한 성공과 실패만이 있을 뿐이고, 그로 인해 양극화와 불평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