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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의 하사웨이 - 키르케의 마녀』에 대한 또다른 해석 - 시간과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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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의 하사웨이 시리즈의 주된 테마 중 하나는 시간이다. 케네스랑 백작이 기기에게 인생에 대해 논하는 장면도 그렇고, 시계가 자주 노출되는 연출 역시 그렇다. 백작은 과거 기기에게 365일 중 즐거운 날이 하루가 있다면 나머지는 지루해도 된다며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했고, 케네스는 홍콩으로 떠나려는 기기에게 인생은 원래 재미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바운덴우덴 백작의 별장에서 백작과의 생활을 준비하던 기기는 하사웨이 노아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보곤 한다. 이때 예의 그 시계가 다시 한 번 스크린에 비친다.

기기가 보기에 백작은 가여운 사람이다. 백작은 막대한 부귀를 이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큰 미련이 남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주변인들은 백작이 어서 죽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반면 케네스는 평민 출신인 배경과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다. 기본적으로 유능하지만,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것을 쟁취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기기가 보기에 백작과 케네스는 종속된 인물이다. 축적된 부는 노년이 된 백작에게 역설적으로 족쇄가 되었고, 케네스의 성공을 향한 집착은 그의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재미가 없다.

기기는 백작을 떠날 결심을 하게된다. 기기의 삶 역시도 백작에게 종속된 삶이었기 때문이다. 홍콩의 별장에서 떠날 준비를 마친 기기는 거울을 보며 “더 살고 싶어졌어요”라고 독백한다. 추측컨대, 백작의 인형으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 ‘기기 안달루시아’의 삶을 살고 싶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백작의 종속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이다. 그다음 이어지는 독백은 “어쩌면 그것이 나의 운명, 나는 죽으러 가는걸지도 몰라요”이다. 이것은 백작이라는 상징계적 세계 바깥으로 나아가는 기기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대사이다. 상징계 바깥에는 죽음충동의 세계(실재계)가 있다. 그러나 진리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광야로 나가듯, 부처가 출가하듯 그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그곳은 공포로 가득찬 곳이지만, 아버지와 대타자의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선 거기로 나아가 진리와 대면하는 수밖엔 없다. 그리고 이것은 기기의 운명이다. 내가 보기에 기기는 ‘-1’로 표현될 수 있는 존재이다. 남성적 욕망으로 구축된 상징계적 질서의 어느 곳이든 기기가 들어간다면, 그 질서는 삐그덕대고 붕괴되며 끝내 상징계적 언어를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키르케의 마녀이다. 진리는 기기의 얼굴을 하고 있다.

따라서 하사웨이가 갖고 있(다고 믿)는 팔루스, 즉 마프티의 정체성을 깨부술 수 있는 것도 기기일 것이다. 작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계, 기기가 하사웨이를 떠올릴때면 등장하는 그 시계는 하사웨이가 다바오에서 기념품으로 구입한 시계이다. 이 시계는 마프티 공습때 호텔이 폭격당해 망가진 채 발견되는데, 이것을 기기가 가져와 고쳐서 사용한다. 나는 그 시계를 마프티란 정체성으로부터 정지당한, 인간 ‘하사웨이 노아’의 정체성을 뜻하는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기가 시계를 고친 것을 다시금 ‘하사웨이 노아’로서의 시간을 흐르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다시말해, 마프티에 종속된 삶이 아닌, 인간 하사웨이 노아로서의 삶을 살게한다는 것이다.

백작을 떠난 기기는 케네스의 부대를 거쳐 에들레이드 기지로 향한다. 이곳에서 케네스가 말하길 몇만 에이커의 땅을 구입해대는 연방의 유력자들이 있다고 한다. 기기가 그 연유를 묻자 케네스는 영생을 사려는 시도라고 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돈으로 영생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기기는 백작을 떠올리며 인간이 죽었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젊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리고 하사웨이를 만나러갈 결심을 하게 된다. 여기서 젊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것, 동시에 인간이 죽었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경험’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돈도 명예도 그 빛을 잃는 순간에 인간에게 남는 것은 그의 ‘서사’일 것이 분명하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가장 큰 능력은, 인간은 ‘자기의 본질’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대화한다. 인간은 자기자신과 대화한다.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나이자 당신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에게 서사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선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자신의 의지와 이성에 따라 세상을 파악하고 개척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앞선 맥락과 함께 이야기해보자면, 종속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어야한다. 또 마르크스가 말하길 “시간은 인간의 발전의 공간(空間)이다”라고 하였다. “자유로운 시간을 조금도 가지지 못”하고, “수면과 식사 등등의 순전히 육체적인 요구에 의해 생겨나는 중단” 이외에는 생활 전체를 빼앗겨 버린 인간은 “가축보다도 못하다”고 말한다.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의 논의에 따라 기기의 선택을 이해해보자면, 종속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하며 자신의 서사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삶을 제멋대로 살아야한다는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오해는 곤란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모두 느낄테지만, 종속되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기가 그러했듯, 진리를 마주하기 위해 그 밖으로 한 번씩 나가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스스로를 위해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기기가 통찰했듯, 인간이 죽었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그 무엇, 나의 해석으로는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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