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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과학

 

The Astronomer, 1668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은 그의 저서인 서양철학사서론 첫머리에서 철학이란 신학과 과학 사이의 중간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철학이 어떤 성질의 학문인가를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철학에는 근원적 존재, 지고지선(至高至善)의 가치, 절대자 등을 파악하려는 넓은 의미의 종교적 태도가 깃들어 있으며, 동시에 엄밀한 논리와 치밀한 분석으로 세계의 기본 구조와 질서를 밝히려는 과학적 태도가 철학적 탐구 정신의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철학을 종교, 신학, 과학과 곧바로 등치시킨다면 곤란하다. 철학은 절대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이성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세계의 부분적객관적 기술보다는 그 전체적인 의미 연관 해석을 도모하여 왔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철학이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경우, 철학은 그 본래의 의의를 상실하고, 종교와 과학의 부차적인 지위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중세에 철학이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였다면, 현대특히나 AI와 로봇의 시대가 도래하는 작금에는 과학의 시녀”(ancilla scientiarum)로 까지 격하된 형편이다. 여기서 철학이 종교 및 과학과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은 철학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철학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철학은 과학과 함께 고대 희랍인들의 합리적 탐구 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전통적인 신화적 세계관에 회의를 품고, 변화무상한 현상의 근원적 원리를 합리적으로 탐구하려는 사고방식의 변혁, 이른바 신화(mythos)로부터 이성(logos)으로의 전환을 이룩한 탈레스에게 있어서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만유에 대한 환상적정서적주관적인 신화적 설명 대신에 실증적 이성적객관적인 설명을 시도하였다는 것은 곧 과학적 탐구의 제일보이기도 하였다. 주의할 것은 이들 초기 철학자들의 탐구의 대상이었던 퓌시스(physis)가 곧 자연과학적인 의미의 '자연'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를 비롯한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이 탐구한 것은 자연 자체를 탐구한 것이 아닌 배후에 놓여있는 arkhe, 즉 근본적인 시초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에 관철되어 있는 원리에 대해 탐구였다. 그렇지만, 이들 철학 속에서 이미 배태된 과학적 요소들은 이천년 후에 독립된 개체로 태어날 자연과학들의 모태이기도 하였다.

 

철학과 과학은 고대 희랍 시대 이래 오랫동안 미분화된 상태에 있었다.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이 통틀어 철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져 왔다. 그러나 근세 이후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과학은 철학으로부터 분가하여 독립하기에 이르렀고, 다시 점점 세분되고 그 연구가 깊어져서 과학의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철학은 그 영역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엔 사실 세계의 인식은 과학에 맡기고 철학은 과학적 지식이 표현된 명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 의미를 명백히 밝히는 것이 그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논리적 실증주의를 대표하는 슐리크(Friedrich Albert Moritz Schlick, 1882-1936)의 견해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의의를 표현의 의미와 명제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사상을 명료화하려는 노력'이라고 천명하면서, 철학의 방법은 '의미의 발견'이요, 과학의 방법은 '진리의 발견'에 있다. 그리하여 과학은 '진리의 추구'. 철학은 '의미의 추구'라고 한다.

 

철학을 의미의 탐구라고 보는 견해는 수긍할 만한 견해이나, 그것이 과학과의 대립적인 관계에 있어서 또는 과학에 밀려나서 철학이 겨우 차지하는 최후의 영토라는 주장에는 논의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철학이 사실 세계에 관한 지식 영역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선고를 받은 이유를 philosophia가 갖는 어의의 이중성에서부터 찾을 수도 있다. 철학은 그저 sophia가 아니라, 'philo-sophia'이며 또 이때 'sophia'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Sophia'는 두 가지 사태에 대해서 대립되는 의미로 쓰여진다. 그 하나는 무지에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sophia이다. 이 때의 sophia'지식' (knowledge)을 의미한다. 이에따라 철학을 '지식의 추구'로 이해하는 경우, 과학과의 구별이 용이치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도 무지'를 극복하려는 지적 노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선 앞서 언급한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 탐구대상과 권위를 과학에 양도하고, 철학의 한없이 다양한 견해들은 우리의 지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물론 sophia지식'으로 보더라도, 그 영역이 일부에 국한된 개별과학의 탐구 대상에 관한 지식과 존재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철학적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대상의 차이에서 철학을 보편학(scientia universalis)으로 규정하고 특수학(scientia particularis)으로서의 개별과학들로부터 구별하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때 철학의 대상이 '전체'라고 해서 그것이 모든 개별과학의 대상을 합친 집합으로서의 전체나 그에 대한 지식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진대, 대상이 부분이냐 전체냐를 기준으로 해서 과학과 철학을 나누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선 철학과 과학의 구별을 연구 방법론상의 차이에서 찾는다. 과학이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하는 귀납적 방법을 주요 방법으로 삼는 반면에, 철학에는 직관적 방법, 현상학적 방법, 비판적 방법, 해석학적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목표는 과학과 철학이 같으면서 단순히 그에 이르는 방법만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방법이 다르다는 것에서 벌써 동일한 성질의 '지식'(sophia)을 노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철학이 문제 삼는 sophia가 단순히 과학적인 '지식'의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Sophia의 또 한 가지 의미는 '어리석음'에 대립되는 '지혜'(wisdom)의 의미이다. 철학을 지식 뿐만 아니라 지혜에 대한 탐구'로 규정할 때, 과학으로부터 구별짓는 중요한 경계선의 하나를 확보하게 된다. 과학이 목적하는 것은 사실들 사이에 성립하는 법칙의 발견이며, 이 법칙이라는 것은 결국 사실을 사실로서 '기술'하는 데 불과한 것이므로, 과학적 지식은 그 본성상 평가적요소를 포함하지 않으며 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에 선악미추귀천 등이 있을 수는 없다. 오직 진위만 있을 뿐이다. 과학적 지식이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며 참된 기술을 소유한 '상태'임에 반하여 철학적 지혜'는 인생과 세계를 그 전체적 의미 연관에서 이해하고 그 내면의 깊이를 통찰하는 올바른 판단'활동'이라고 할 것이다. 지혜를 이러한 가치판단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철학이 목표로 하는 sophia는 과학의 그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에 대한 평가를, 사실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지 않으니, 사실로부터 가치를 도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hilo-sophia는 문자 그대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지혜의 '획득'이라기 보다는 획득에로의 끝없는 '도정'이요 끈질긴 비판 활동이다. 철학의 이러한 성격으로 볼 때, 그것이 과학과 어떻게 다르며 어떤 관계에 있는가는 스스로 명백해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철학과 과학은 그 탐구 대상이 서로 다르다. 과학이 기술'하는 사실이 개개의 과학의 한정된 부분적인 것임에 반하여, 철학이 찾는 의미 연관은 탐구의 주체인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이 때 세계 전체는 각 개별과학들이 다루는 문제영역들의 총체가 아니다. 그것을 하나의 총체로 이해할 때, 철학은 실증성이 없는 '지식의 체계'로 간주되어 그 영역은 발전하는 과학에 의하여 점점 축소되지 않으면 안되며, 급기야 종래의 철학체계는 온통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철학의 탐구 대상인 지혜는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 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과학에 있어서나 무반성적으로 간과되어버리는 객관적 사실세계를 다시금 붙잡아, '앞에' (pro) '던져진 것' (blema) [즉문제(problem)]으로 인수하고, 그 속에 파묻혀 예사로이 넘어가서 '잃어버렸던 것' (letheia)'되찾아'(a-) 드러내는 진리(aletheia) 발견의 끝 없는 도정이다. 사실의 객관화된 현상적인 기술을 근원적으로 포괄하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은 그 본성상 지칠 줄 모르는 비판적 물음의 연속으로서 실증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거를 묻는 것이며,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그러한 기술의 방법과 의미를 묻는 것이며, 지식이 아니라 그 전제와 전체적 관련을 묻는 것, 요컨대 우리가 일상생활 과학적 탐구에서 교섭하고 있는 것 전체의 근거와 의미를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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