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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2026) |
어쩌면 섬광의 하사웨이 소설도 보지 않고 글을 주절주절 쓰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이번 글에서는 『섬광의 하사웨이 – 키르케의 마녀』에서 나타나는 구도를 합리와 비합리의 대립이란 축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해당
시리즈에선 유난히 ‘운’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언급된다. 이것에 힌트를 얻어 본문과 같은 해석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본 해석에서 합리를 사전적 의미처럼 이성적 사고에 국한하여 다루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본 작품에서 합리에 속할 수 있는
것은 질서, 실력, 상징계, 문명, 관료제, 지구연방의 구조 등이다. 이것들을 굳이 합리의 카테고리에 넣는 이유는 인간의 의식적
활동에 따라 세울 수 있는 규범과 체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에 속하는 것은 무엇일까. 합리에 반대되는 그
무엇일 것이다. 예컨대 자유, 운, 실재계, 야만, 테러리즘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규범과 체계에 균열을 내는 힘과
연결된다.
이러한 해석 틀 속에서 인물들은 각각 다른 위치를 점한다. 레인 에임은 합리성 그 자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군이라는
관료제 안에 속해있으며, 실력과 절차, 명령과 성과의 세계를 믿는다. 그에게 세계는 합리적 원리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며,
비합리적 요소는 혐오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는 기기나 케네스가 보여주는 비합리적 면모를 불편하게 받아들인다. 특히 케네스의 경우,
자신과 같은 관료(군)의 지평에 서 있는 인물인 줄 알았으나, 기기를 통해 운과 비합리적 예측의 세계에 매혹되는 것을 보고
케네스를 ‘싫어하는 어른’으로 규정한다. 어떻게 보면 레인 에임은 합리성에 매몰된 젊은 세대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케네스는 합리성의 토대 위에 비합리성의 균열을 내려는 인물이다. 그는 지구연방의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합리성이
닿지 못하는 지점,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운의 영역에 진리의 일부가 나타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기에게 끌린다. 기기는 인간의 운이 어디까지 통하는지를 시험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하사웨이는 이 둘과는 또 다르다. 하사웨이는 비합리 위에 합리를 세우려는 인물이다. 하사웨이가 속해있는 마프티라는 조직은
기본적으로 테러리스트 집단이다. 테러리즘은 문명적 질서, 관료적 구조, 제도적 폭력에 균열을 내는 야만적인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하사웨이는 그 비합리적 행위 위에 대의, 절제, 육욕의 통제 등의 질서를 세우려고 한다. 이것은 후술하겠지만, 하사웨이가
마프티에 가담하게된 전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사웨이는 구조를 깨는 자이면서도 자신의 내부에서는 구조를 세우려는
자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기기이다. 기기는 비합리를 대표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기는 운 그 자체이며, 상징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이다. 기기는 상징계의 그 어느 곳에 들어가든 그 체계에 균열을 만드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기기의 존재를 ‘-1’로
표현한다. 라캉적인 관점에서 진리는 상징계의 균열 속에 드러난다. 말하자면 공집합에서 그것은 반쯤 얼굴을 드러낸다. 공집합이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인 것처럼 기기 역시도 그러한 존재이다. 진리는 기기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기기는 키르케의 마녀이다.
작중에서 예를 들자면, 하사웨이는 기기에게 말려들어 제때 다바오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바오 공습에선 연방 고관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있었다. 또 케네스 역시 기기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말실수를 하고 군사 기밀을 흘린다. 이 모든
것이 상징계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다. 말실수, 더듬거림, 농담과 같은 어긋난 발화, 우리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편린이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기기가 홍콩의 백작 별장을 떠나기 전에 TV를 보며 “이곳에 있으면 진실을 알 수 없다”고 독백하는 장면도 이러한 맥락과 통한다.
백작의 별장은 백작이 구축해낸 상징계적 질서이다. 그 질서 안에 머문다면 부와 권력, 안정과 보호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기기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기기는 상징계를 벗어나야 비로소 그 진리의 편린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기는
독백한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운명, 나는 죽으러 가는걸지도 몰라요.” 이것은 이전 해석에서도 말했듯, 백작이라는 상징계적 세계
바깥으로 나아가는 기기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대사이다. 상징계 바깥에는 죽음충동의 세계(실재계)가 있다. 그러나 진리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광야로 나가듯, 부처가 출가하듯 그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기기는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주변 인물들은 꽤나 쉽게 기기에게 호감을 가진다. 기기는 주변 인물들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사랑은 일종의 ‘열림’이다. 사랑이란 사건은 주체에게 ‘열림’을 도입한다. ‘열림’은 폐쇄된 전체에 불균형, 불안,
균열을 가져온다. 예컨대, 인간은 자연의 열림이고, 사랑은 인간의 열림이다. 그러므로 기기가 하사웨이와 케네스 모두에게 균열을
일으키는 이유도 기기가 균열을 내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하사웨이의 ‘마프티’로서의 자아에 균열을 내고 인간 ‘하사웨이 노아’로 구출할 수 있는 인물도 기기이다. 기기는 자신의
주체적 선택으로 케네스에게 있다가 하사웨이에게 떠나버린다. 2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프티’로서 각성한 하사웨이를 멈추게하고
그에게 인질의 형태로서 합류한다. 이 소식을 들은 케네스는 애들레이드에서 슬픈 표정으로 “인간의 운을 더 시험해보고 싶었는데”라며
독백한다. 그러면서 스크린에는 거대한 전파장치가 비춰진다. 이 시점에서 케네스는 비합리를 포기하고 완전한 합리의 길로 돌아선다.
기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예의 그 전파장치는 합리성으로서의 문명을, 지구 연방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기를 인질로 얻은 하사웨이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기기와 함께하여 ‘마프티’로서의 자아를 상실하는 것과
‘마프티’로서의 대의를 택하여 혁명을 계속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하사웨이의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기와
함께하면 그는 더 이상 ‘마프티’로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기기 없이 혁명을 계속한다면, 그는 충분히 비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혁명에 성공할 수 없다. A와 ~A가 똑같은 B, 즉 혁명 실패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변증법적 필연이다. 이 필연은
하사웨이가 ‘마프티’로서의 자아와 대의를 구축한 전제가 퀘스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케리아의 짐작대로
기기는 퀘스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기기가 퀘스의 자리를 꿰어찬다면 ‘마프티’로서의 자아를 유지하는 전제 역시도
사라져버린다. 혁명을 계속할 수 없다.
기기는 하사웨이에게 “당신이 신이 되면 되잖아”라고 말했지만, 하사웨이는 신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신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무오류의 독재자가 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나는 거기에 더해 ‘자유’라는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프티는
자유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스페이스 콜로니와 지구 사이에 있던 대립구도가 이제는 지구 내부의 시민과 연방 기득권층 사이의
대립으로 재현되는 상황에서, 마프티는 억압받는 자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만든 테러리스트 조직이다.
여기서 ‘자유’는 신적인 개념이다. ‘자유’는 그 자체로 무규정적인 개념이다. 그 안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다. 바로 그
무규정성 때문에 자유는 신적이다. 하사웨이가 신이 된다는 것은 이 자유의 이념을 완전히 체현하는 것, 육화된 존재로서의 신이 되는
것, 보편자가 개별자화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대의가 순수한 자유의
이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퀘스의 상실이라는 개인적 결여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사웨이의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의미없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이
프랑스 대혁명을 보며 통찰했듯, 혁명을 실제로 완성시키는 것은 반동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헤겔의 표현에 따르면 ‘절대적 자유’의
형태로 폭발했다. 이것은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이어져 무조건적인 부정, 인간을 단두대에 보내 양배추의 밑동처럼
잘라내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후 헤겔이 말을 탄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상찬했던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에 의해 혁명은
제압되고 프랑스는 다시금 왕정으로 복고한다. 그러나 혁명 이전의 왕정과 혁명 이후의 왕정은 다르다. 절대군주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같은 군주정이지만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군주정이 다르단 걸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혁명을 진정으로
실행시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반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실패한 혁명은 세계에 균열을 남긴다. 그리고 그 균열은 진리가 나타나는 장소이다. 하사웨이의 실패는 지구 연방이라는 거대한
구조에 균열을 남길 것이다. 그 균열은 작품을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나타난다.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그것이 테러리즘의 형태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프티의 항쟁을 응원하는 현상이 바로 균열이 우리에게도 나타났다는 ‘증상’이다. 키르케의 마녀가 보여주는
균열이 스크린의 벽을 넘어 우리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마력(魔力)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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